2006년의 한국이 민주주의 사회라고 믿는 것은, 미국이 민주주의를 확산하기 위해 전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씁쓸한 일이다. 국가보안법이 살아 숨쉰다는 사실이나, 강정구 교수의 구속, 한나라당이 제 1 야당이자 최고 지지도 정당이라는 점, 조중동의 사설로부터 아직도 색깔론이나 '좌파 전교조' 놀음을 구경해야 한다는 점, 주민들이든 시위대든 여하튼 아직 국민들이 발을 붙이고 있던 대추리 땅에 공병대가 투입된 사건...... 한국의 민주주의가 허울뿐인 민주주의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너무나 많다.

그런 거대 담론까지 가지 않아도 좋다. 정부 시책에 대한, 혹 지역 현안에 대한 작은 공청회라도 참여해 본 적 있다면, 사실 그것이 공청회가 아니라 보고대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게 된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주민들이나 이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려 하는 테크노스트럭쳐는 한국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조섞인 목소리로 읊조린다. "정부가 추진하는 일 중에 안 된 일 본 적 있나?" 고종석씨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대통령은 테크노스트럭쳐와 정당, 이익 단체의 목소리를 조율하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이익 단체의 목소리는 돈이 많을수록 커지고, 가난할수록 작아진다. 민주정치(Democracy) 대신 로비정치(Lobbycracy)가 들어선 이 땅에, 사회적 약자들은 목소리를 낼 방법이 없다. 아니, 약자 뿐이 아니다. 강자가 아닌 모든 이들이 목소리를 낼 방법이 없다.

그들 중 대다수는 목소리를 내기를 포기한다. 테크노스트럭쳐, 삼성, 전경련, 정당...... 이들 사회적 강자들이 정한 룰을 말없이 따르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재산이나 명예의 정도에 따라 선거권을 차등 부여하는 것이 부당하다면, 피선거권이나 정치 참여의 권리를 차등 부여하는 것도 부당하지 않은가? 대통령 선거에서 이건희에게 1만 표를 주고 예인에게 1표를 주는 것이 부당하다면,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 이건희가 1천만의 영향력을 가지는 대신 예인이 1의 영향력만 가지는 것 또한 부당하지 않은가?

이를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소수는 우회로를 택한다. 미술, 음악, 소설, 시...... 고은이 그랬고 피카소가 그랬고, 또 김지하와 김수영, 조세희가 그랬던 것처럼 예술을 소통의 통로로 찾는다. 그래서 나는 어떤 예술가들이 로비크라시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이명박을 증오하게 되었고 이문열에 대한 호의를 접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보다 적극적으로, 보다 확실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 그것은 투쟁밖에 없다.

그런데 그들이 목을 내놓고 투쟁을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와 관계없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면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인 정부가 폭력으로써 그 목소리를 다시 억누르게 된다. 여기에 저항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 비록 미약하기 그지없더라도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합법적 폭력에 억눌리지 않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야 폭력에 치를 떨고, 꽃으로 폭탄을 만들던 히피를 동경하며,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던 김혜자씨의 말에 깊게 공감한다. 술자리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주먹 자랑, 군대 얘기, 세상의 위계서열 문화를 모두 혐오한다.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다. "폭력"이라고, 똑같이 쓰고 똑같이 인식되지만 그 내재된 내용은 전혀 다르다. 그들의 폭력은 이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최후의 방법으로 폭력을 선택한 약자들의 마음이, 이건희가 내는 목소리의 백분의 일 크기라도 세상에 자신을 외치고 싶은 자아의 분출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자다. 언제 강자가 몰려와 그들을 억누를지 모른다. 구속영장을 받아 구치소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곤봉에 찍혀 피가 흐를지도 모르고, 자칫 재수가 없으면 거기 휩쓸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정말 절박하지 않고서야, 그런 위험천만한 "약자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겠는가?

그 투명하기 그지없는 폭력에 붉은 페인트를 칠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강자의 폭력에 침묵하면서 유독 약자의 폭력에만 침을 튀기는 도덕주의자들은 누구인가. 전교조니 NGO니, 한총련이니 하는 이름으로 창을 만드는 사람들은 또 누구인가. 괴로워 미칠 것만 같다. 따뜻한 방 컴퓨터 앞에 앉아, 팔짱을 끼고 "얼치기 폭력주의자들"을 비웃을 그 도덕주의자들의 얼굴을 떠올리자니, 괴로워 담배라도 물고 싶다.


2006/05/07 00:18 2006/05/07 00:18

http://yeinz.kr/blog/trackback/48 (주소를 클릭하면 클립보드로 복사됩니다.)

  1. 키는 정부가 쥐고 있다. '명랑노트' 배움의 장. 에서 트랙백 | 2006/05/07 00:37 | 지우기 |

    아니 그런가? 이 영화를 기억하시는지? 힘으로 누를 일이 아니다. 원외 정치세력이 개입을 했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지금 이대로 가면 더 많은 가치와 담론들이 그 위에 더해질

  2. "반미 좀 하면 어때!" 뜨거운 감자 - 평택 미군기지 이전 민주통신 블로그 에서 트랙백 | 2006/05/07 01:27 | 지우기 |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가 노무현 정부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이쯤에서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한마디쯤 하실 때가 되지 않았나싶다. "반미 좀 하면 어때?" 하고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

  3. 평택 시위와 강남 재건축 CN의 연습장 에서 트랙백 | 2006/05/07 03:26 | 지우기 |

  4. 대추리, 그 기만의 매트릭스 민노씨 에서 트랙백 | 2006/05/07 09:44 | 지우기 |

    #. 이 글은 조금씩 \'업데이트\'합니다. 그 기한은 06년 5월 7일 자정까지로 일단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단 한줄로 시작하고, 그 한줄을 계속해서 틈틈이 7일 자정까지(앞으로 약 24시간 동?

  5. 짧은 선동 [진행 중] ozzyz review 에서 트랙백 | 2006/05/08 01:10 | 지우기 |

    올해 들어 한 가지 스스로 약속한 것이 있다면, 이제 그만 선동의 언어를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딱 한번만 더 해야 할 성 싶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 더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6. 평택 문제. 견딜 수 없는 것. log for me. 에서 트랙백 | 2006/05/08 04:06 | 지우기 |

    '폭력 시위'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근절(지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나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 국민들의 절반 이상은, 이라크 파병에 찬성했었다. 그들의 이중성을 견딜

  7. 전경들이 요구해야 할 것 myeyes 에서 트랙백 | 2006/05/08 15:13 | 지우기 |

  1. 무적전설 2006/05/07 04:33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 어제 비도 오고 뉴스들도 참 마음이 아프고...
    술 한잔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네요... 포스트 잘 보고 갑니다.

  2. 예인 2006/05/08 13:38 | PERMALINK | 고치기 |

    스물 둘 짜리 어린애를 이해시키기엔 세상이 너무 더럽습니다. 욕지거리라도 퍼부어야죠.

  3. thirdtype 2006/05/08 08:57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라 더욱 와닿는 군요...
    좋은 하루 되세요~

  4. 예인 2006/05/08 13:42 | PERMALINK | 고치기 |

    저 또한 무지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래도 뭔가 문제가 있단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범대위가 먼저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소수에게 그런 소통의 구조가 확보되어 있다면야, 누가 폭력을 선택하겠습니까......

    문제는 비기득권층으로선 기득권층과 소통할 방법이 아무 것도 없다는 거겠죠. 이게 어딜 봐서 민주주의란 말입니까. 지극히 천박한 자본주의에 불과하지......

  5. 지나가다 2006/05/08 19:19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옛날에 읽었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가 생각나는 글이군요.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합리적인 방식과 결과가 역사적으로 결국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운동이 그래왔고, 인권운동이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무임승차해온 것은 미안하지만요!!
    (동의하진 않지만)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6. 예인 2006/05/10 00:10 | PERMALINK | 고치기 |

    전설의 누리꾼 "지나가다" 씨에게도 블로그가 있었군요. ㅎㅎ

    뜬금없는 얘긴데, 개인적으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저자를 매우 싫어합니다. 특히 최근작 "세계는 평평하다"를 읽고 너무 실망한 까닭에......

    이런 뜬금없는 얘기를 꺼내든 이유가...... 마지막의 "동의하진 않지만" 이란 문구나 "무임승차"같은 표현 때문에,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이 안 되서 그럽니다. 어쨌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7. 뒹구는 돌 2006/05/10 11:22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잘 읽고 갑니다. 그 사건이 나던날 저는 술마시고 있었습니다.
    빚진 기분입니다.

  8. 예인 2006/05/12 22:16 | PERMALINK | 고치기 |

    제가 하는 짓이라고 뭐 다를 거 있겠습니까.
    저는 앓아 누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_-a;;